[사료발굴] 족보 뒤표지에서 되살아난 1615년 상소의 이름들…<을묘소녹명> 세상에 나오다광해 7년 정택뢰 상소 연명록 실물 확인…‘유학 참소자’ 43인 실명 첫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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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11년 간행된 『곡산한씨족보』의 표지(왼쪽) 象山譜乘(상산보승)과 뒤표지(오른쪽)가 탈락된 상태에서 속지 형태로 발견된 <을묘소녹명>. 족보 뒤표지 황장지 속에 비장돼 전래된 흔적이 확인된다. (사진=한학중 곡산한씨종친회 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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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보고, 서울=오영세 기자] 광해군 재위 7년인 1615년, 조선 정치사의 격랑 속에서 올려진 한 통의 상소가 400여 년의 시간을 건너 되살아났다. 충결공 정택뢰(鄭澤雷)가 인목대비 폐위 논의와 맞물려 이원익(李元翼)의 삭탈관직·성외송출 조처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올린 상소에 연명했던 참소인 전원의 이름을 담은 <을묘소녹명(乙卯疏錄名)>이 족보 뒤표지 속 비장 상태로 전해져, 사료로서 처음 확인됐다.
이번 <을묘소녹명>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이는 한학중 곡산한씨종친회 이사다. 한 이사는 곡산한씨 옛 족보를 수집·정리하는 과정에서, 1811년 간행된 『곡산한씨족보』 신미보의 뒤표지 황장지 속지로 숨겨져 있던 녹명 단자를 확인했다.
해당 족보는 조선 숙종 연간 춘추관수찬관을 지낸 한덕전의 가문에서 종부 김동분 여사가 가전(家傳)으로 보관해 오던 것으로, 현재는 경주 동천동 곡산한씨종친회가 인수·소장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보관 방식이다. 족보의 뒤표지가 탈락한 상태에서 녹명 단자가 그대로 뒤표지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는데, 앞면은 거의 빈틈없이 풀칠돼 단단히 부착된 반면 이름이 적힌 정면에는 풀칠 흔적이 전혀 없었다. 한 이사는 “단순히 종이를 두껍게 하기 위한 속지였다면 앞뒤 모두 풀칠이 돼 있었을 것”이라며 “후대 전승을 염두에 두고 족보 뒤표지 황장지 속에 의도적으로 비장한 기록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서지적으로도 <을묘소녹명>은 매우 명확하다. 필사본 단면으로 황갈색 기름종이(한지)에 기록됐으며, 지면 크기는 185×288mm, 4단 11줄 구성(말미 비주 12줄)이다. 작성 시기는 상소가 올라간 이후 약 두 세대가 지난 17세기로 추정되며, 충주 감곡 일대에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내용에는 참소인 43명의 이름과 신분, 그리고 후대에 덧붙인 비주가 포함돼 있다.
사료적 가치는 결정적이다. 『조선왕조실록』과 『대동야승』, 『월봉집』 등 기존 문헌에는 을묘년 상소에 참여한 생원·진사 일부의 이름만 전할 뿐, 유학(幼學) 신분 참소자들은 “유학 몇 명 참소”라는 식으로 숫자만 기록돼 왔다.
<을묘소녹명>은 그동안 실체를 알 수 없었던 유학 참소자 전원의 실명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며, 조선시대 상소 참여의 사회적 저변을 구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 자료는 1월 15일, 서울시의회 의원회관 별관 2층 제2대회의실에서 열린 ‘한국 족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2차 족보 현황 발표대회’를 통해 처음 공식적으로 공개됐다. 한학중 이사는 이날 곡산한씨 문중을 대표해 발표자로 나서, 족보 발굴 과정과 함께 <을묘소녹명>의 발견 경위와 사료적 의미를 현장에서 직접 설명했다.
이번 발표대회는 ‘한국 족보 전체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취지의 전국적 추진 운동의 일환으로, 지난해 7월 국회 차원의 공감대 형성과 승인 절차를 거쳐 족보 등재 추진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두 번째로 열린 자리다.
앞서 지난해 11월 4일 열린 1차 발표대회에는 30개 문중이 참여했으며, 이번 2차 발표대회에는 전국 28개 문중이 참석해 각 문중이 소장한 고족보와 전래 현황을 발표했다.
현장에서는 <을묘소녹명>에 이름이 오른 43명의 참소인 선조를 둔 여러 문중이 큰 관심을 보였고, 한 이사가 준비해 간 자료를 요청해 공유하는 모습도 이어졌다. 이는 이 기록이 특정 가문의 문중 자료를 넘어, 여러 문중이 공유하는 집단 기억의 사료로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한학중 이사는 “이 녹명은 단순한 명단이 아니라, 광해 연간 정치적 압박 속에서도 뜻을 함께했던 유생 공동체의 실명을 역사 속으로 되돌려 놓는 기록”이라며 “족보가 혈연 기록을 넘어 정치·사회·사상사를 담은 기록유산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세계기록유산 등재 논의에서도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족보 뒤표지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에 숨겨졌던 이름들이 이제 공적 사료로 복원되면서, <을묘소녹명>은 조선 상소사의 공백을 메우는 결정적 단서로 주목받고 있다. 무엇보다 이 기록을 발견하고 세상에 알린 한학중 곡산한씨종친회 이사의 집요한 자료 추적과 문제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에서, 이번 성과는 ‘발견의 역사’로도 기록될 전망이다.
뉴스보고 news-reposito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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